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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
김승규 / kmcksg
kmcksg@hanmail.net
986
2023-10-12 22:00:50
1164
  2023년9월24일-인식일의 주인 되신 에수님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2:18~28
요절:마가복음2:28

예수님은 나병환자도 깨끗게 해 주시고 악명 높은 죄인 세리도 부르사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유대 사회의 전
통과 가치를 뒤엎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릇된 가치관과 전통과 관습을 타파하시고 진리에 기초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금식과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또다시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는 복음과 율법주의의 충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팽배해진 비 복음적인 요소들인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와 율법
주의를 과감히 깨시고 복음의 생명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떠한 것도
깨부수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일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갈 때 배고풀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 배가고파 밀이삭을 비벼먹기도 했
습니다. 그런데 최근 레위의 변화로 인하여 세리족속들이 큰 은혜를 받고 너도나도 계속하여 초청을 하는 바람에 제자들은 연
일 모처럼 배부르게 먹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
다. 왜 너희는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당시 금식은 경건의 표시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회개의 표시로 몸을 괴롭게 하는 금식을 하였습니
다.(레23:27) 그러나 나라에 위기를 당하면 금식하는 것을 첨가시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1년에 4번씩 금식하였고, 예수님 당
시에는 1주일에 두 번씩 하였습니다.(눅18:12) 금식은 경건의 척도가 되어 금식을 잘하면 경건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건치 못한
자로 낙인 찍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것이 형식화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을 흉
하게 하여 자신이 경건한 자임을 나타내었습니다.(마6:16)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음
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신부에게 있어서 신랑은 참 소망이요 기쁨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모시는 사람들은 레위 집에서 잔치하며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사람들같이 예수님을
통해 기쁨을 맛보고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서 잃어버렸을 때는 금식하
며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율법주의에 빠져서 외식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삼베와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새 포주를 담가 놓으면 왕성한 효소의 활동을 통해 두 배 이상으로 팽창하여 부피가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아 놓으면 낡은 부대는 터지고 찢어져서 새 포도주마저도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고 낡은 부대는 율법적이고 굳어버린 마음을 의
미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온갖 우상숭배의 구습들이 타파되고 예수님을 중심한 복음,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고 하나님
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과 복음을 새롭게 영접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
야 합니다. 낡은 전통과 율법적인 구습에 예수님을 맞추려고 하면 찢어지고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신선한 예수님과
복음에 우리 굳어진 마음을 찢고 바람처럼 임의로 부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형식을 끊임없이 바꾸어야 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주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항상 새롭게 변화하고 즉시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
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기심, 교만, 시기, 안일, 무책임, 자기 중심적인 생각등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는 단단한 껍
질들이 많습니다. 전통과 나쁜 습관등도 있습니다. 이런 헌 부대들을 과감하게 깨고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되고 새로
워 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안식일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비벼 먹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다윗의 예를 들어 변호해 줍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다윗이 황급하게 피난을
가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에게는 사흘이나 굶고 온 다윗에게 줄 떡이 없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
바로 앞에 한쪽에는 일곱 금촛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떡상이 있었습니다. 금으로 된 그 떡상에는 언제나 12개의 떡이 놓여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새 떡으로 바꾸어놓게 되어 있고 물린 떡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떡들은 생명의 양식되시는 예
수님을 나타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고 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날 아침에 물린 떡을 다윗에게 줍니다. 다윗이 이 떡을 얻은 것이 결코 잘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의 긍휼하심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에 앞서는 것이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요, 또 하나는 경건이 중요
합니다. 다윗이 만일에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이 자리에 왔다가 떡을 보고 '하나 먹어볼까'하고 먹었던 것이라면 죽었을 것입니
다. 먹어서는 안 되는 떡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떡인 줄 알면서도 제사장이 내어 줄 때에 죄송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경
건한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 떡을 먹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법 위에 법이 있다는 점입니다. 법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모든 법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법을 초월한 법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이 제자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밀 이삭을 비벼먹은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튼 잘한 일은 못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그것을 먹었다고 해서 벼락이라도 치실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오.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율법 전반에 대하여 귀중한 진리를 설파하시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괴롭히시자고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
시려고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요, 율법과 규례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하
심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 하심입니다. 모든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 같은 신학적 문제를 놓고 루터의 해석이 마음에 들어서 종종 말씀을 드립니다. 백 번이라도 생각해 볼만한 것이기 때
문입니다. 루터가 「대요리문답(大要理問答)」에서 말한 것을 보면 율법에 대하여 대강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
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면 서로가 툭하면 마구 죽이고 죽고 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
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킨다면 우리는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
나 중요한 일입니까?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도둑
질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우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우리의 인격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릇 속임을 당한다는 것은 인격을 빼앗기는 것이요 짓밟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주신 법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억지로 지킬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감
사하는 마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안식'이라니 누구의 안식입니까? 안식(安息)이란 쉰다는 말
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쉬라 하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일
주일에 하루는 쉬어라, 그러고도 먹고살게 해주마 하심입니다.
부흥회를 갔는데 나이드신 집사님 한 분이 식사를 대접하며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꼭 교회에 나갑니다. 그게 못마땅해서 “이 사람아, 바쁜 세상에 일주일 쉬지 않고 열심히 벌어도
모자라는 판인데 그 아까운 시간에 교회에는 뭣하러 나가나? 그래가지고 언제 돈벌고 어떻게 먹고사나?” 하고 핀잔을 주면서
자기는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20년을 보내고 어느덧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섰는데, 뒤
늦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주일에 하루 쉬고 교회에 나가던 그 친구나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온 자기나 사는 형편은
마찬가지 더랍니다. 손익관계를 따져보자니 결국은 일주일에 하루씩 쉬면서 살아온 그 친구가 하루씩 쉰 그만큼 득을 본 셈이
고 자기는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똑똑해져야 되겠다'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고 말입니다. 하루 더 부지런 피워
봤댔자 더 버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못 박아놓으셨습니다. “내가 먹여줄 것이니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라” 고맙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맘대로 일주일에 아무 때나 쉬어서는 안됩니다. 꼭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날 쉬어야 합니다. 그날은 함
께 쉬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독생자까지 주신 주님을 예배하고, 성도 간에 사랑의 교
제를 나누는 복된 날로 다함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
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신 날(요20:1), 즉 안식후 첫날을 주의 날로 모여 예배하였습니다.(행20: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모님이 자녀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자녀를 위함입니다. 부모님이 자
녀보고 하는 말은 자녀에게 반드시 듣기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납득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기 때
문에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철저히 주일을 성수하
며 복받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년9월17일-죄인을부르러오신예수님
2023년10월1일-손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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